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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ㆍ大百濟 國母 召西奴(소서노) 說話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김 성 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14/03/25 [18:25]

高句麗ㆍ大百濟 國母 召西奴(소서노) 說話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김 성 열

편집부 | 입력 : 2014/03/25 [18:25]

▲     © 편집부
뮤지컬 “소서노”가 서울과 천안무대에 오른다. 부여국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 주몽은 졸본부여에서 召西奴(29세)라는 부호 과부를 만나 그녀의 기반으로 첫도읍지를 서성산(西城山)에 정하고 B.C. 37년에 나라 이름을 옛본디 부여의 국명이었던 고구려라 하였다.

召西奴(소서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새 남편인 청년 영웅 주몽(22세)을 도와 새 나라를 건설했다. 소서노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비류를 주몽과의 재혼으로 온조를 낳았다. 따라서 그녀는 고구려의 기초가 점차 튼튼해져 감에 따라 주몽대왕의 후계자는 비류나 온조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B.C.19년 뜻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다. 주몽은 동부여를 떠날 때 예씨녀(禮氏女)와 혼인하여 유리라는 외아들을 두었었다. 주몽대왕(41세) 재위 19년 때에 돌연 동부여로부터 예씨부인과 유리가 나타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몽대왕이 이들의 등장에 크게 기뻐하고 게다가 유리를 태자로 임명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소서노의 낙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같은 해 9월 마침내 주몽왕까지 붕어하자 소서노는 고구려에서 더 이상 머무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개척정신이 강한 소서노는 비류, 온조 두 아들들을 불러 고구려에서는 그들의 입지가 없음을 설명하고 새 땅을 찾아 나설 것을 설득했다. 소서노가 유리대왕에게 그 뜻을 말하니 마침 미안하게 느끼고 있던 유리대왕은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 일행에게 재물을 넉넉하게 나누어 주며 출발을 허락했다.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마려(馬黎), 전섭(全聶), 조성(趙成) 등 10臣(신)을 데리고 고향인 졸본부여에 들려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더 확보한 후 대 선단을 꾸려 졸본부여로부터 남하하여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항해 후 대 선단이 표착한 곳이 아산만 주변 밀두리(메주골) 이었다. 이곳에 상륙한 비류, 온조 형제는 도읍지를 물색하여 안성천(하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그 상류인 용인 부아산(負兒山)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부아악에 올라 둘러보니 북쪽으로 한수를 띠로 하고, 동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판이 바라보이며, 서쪽으로 큰 바다로 막혀있다. 이러한 천혜의 요새로 된 이 훌륭한 땅이야말로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하여, B.C.18년에 백제국을 건국하고 수도를 위례성(慰禮城)이라 했다. 여기서 비류와 온조는 수도의 입지에 관해 견해가 달라진다.
비류는 밀두리가 바다 조수가 내륙까지 깊이 들어와 통상이 유리한 항구의 이점을 가지고 있어 수도로써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양 세력은 결국 분립하게 된다.

한편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으면서도 고구려를 떠나야만 했던 여걸 소서노는 자신의 소생들인 비류와 온조 마저 화합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컸다. 분립의 원인은 왕도를 정하는 문제였지만 사실은 소서노가 첫 남편에게서 낳은 비류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졸본부여의 토착세력이었고, 소서노와 주몽 사이에 태어난 온조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한때 주몽을 추종했던 이민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 두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이 분립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소서노 일행이 양분된 후 그녀는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고 장자인 비류를 따라 메주골로 갔다. 그런데 B.C.6년에 소서노는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온조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해 비류 측의 장군 5명을 대동하고 남장을 한 채 위례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온조군은 남장한 왕모(王母)를 알아보지 못하고 침입한 비류군의 장군들과 함께 살해했다.

『삼국사기』는 이 부문을 五虎入城(오호입성) “왕도에서 늙은 암 여우가 남자로 바뀌고, 다섯 오랑이가 위례성에 들어왔다. 왕모가 61세로 죽었다”라 적고 있다. 결국 왕모 소서노가 시해된 후 B.C.5년에 온조 세력은 지금의 광주(廣州)로 수도를 옮긴다. B.C. 2년에야 소서노는 비류 백제 측에 의해 국모로서 제사 지내지게 됐다.

이는 아마도 온조 백제 측에 의해 암장된 후 4년 뒤에야 그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여걸 소서노는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이 때문에 백제의 시조를 소서노로 보기까지 한다.

1980년대부터 대백제국모 소서노 제향이 천안향토사계 주관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금번 4월에 뮤지컬 소서노가 천안문화재단 기획으로 서울과 천안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다. 위례 백제역사문화전승이 우리시대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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