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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가 전하는 말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시인 김인희

편집부 | 기사입력 2022/11/07 [10:24]

백제금동대향로가 전하는 말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시인 김인희

편집부 | 입력 : 2022/11/07 [10:24]

 

 

필자는 백제시대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성(부여군)에 살면서 백제의 역사와 유물에 대해 뜨거운 가슴으로 껴안고 있다.

 

백제 왕궁의 보호성이면서 후원의 역할을 했던 부소산성은 주말 산책코스로 즐겨 찾는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간직한 궁남지를 산책하는 것은 일상이다. 발길이 닿는 곳이 백제의 유적지요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백제의 문화재다. 정림사지의 오층석탑을 대할 때는 그가 간직한 상흔이 필자의 가슴에 남은 상처인 양 아려온다.

 

백제의 수많은 유물 중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백제금동대향로(이하 대향로라고 함). 대향로는 이구동성으로 백제 시대의 걸작품이라고 역설한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수백 번을 보아도 흠잡을 곳이 없다. 향료를 제작했던 왕은 누구였을까. 왜 향로를 제작했을까.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 /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대향로는 1993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다. 대향로가 1400여 년의 시간을 깨고 사비성(부여군)을 발칵 뒤집었다. 대한민국을 놀라게 했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향로가 발견된 이후 수차례 조사를 한 결과 향로가 발견된 장소가 백제 시대 왕실의 사찰이 있었던 능사라고 밝혀졌다.

 

대향로가 제작된 시기는 문헌상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대략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라고 추정할 뿐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쫓겨 내려와 도읍을 정한 곳은 웅진성(공주시)이었다. 안팎으로 혼란을 거듭하던 백제가 안정을 찾고 부흥을 꽃피운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물이 바로 대향로라고 역설한다.

 

필자는 붓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대향로를 해부하고자 한다. 대향로는 뚜껑과 몸체와 받침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대향로의 뚜껑과 몸체 사이에 경계선이 있는데 뚜껑을 돌리면 대향로의 몸통과 분리된다. 향로의 뚜껑에는 열 개의 구멍이 있으며 실제로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빠져나가면서 그을린 흔적이 있다고 한다.

 

대향로의 뚜껑은 산봉우리 형상이다. 맨 꼭대기에 봉황이 두 날개를 펼치고 금방이라고 비상할 듯한 자태다. 봉황의 아래 산봉우리에는 다섯 마리의 새가 봉황을 호의 하듯 대기하고 있으며 다섯 명의 악사가 각각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산봉우리 사이에는 여러 동물과 사람들의 모양이 있다. 산봉우리와 신선의 모습에서 도교의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대향로의 몸체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잎이 바깥으로 접힐 듯 조각된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연꽃잎 위에는 수중생물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그 조형 솜씨가 워낙 훌륭하고 뛰어난 수준이라 백제 문화의 정수라고 손꼽으며 능히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조상들의 걸작품이다.

 

대향로의 받침은 수중생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용이 향로의 몸체를 입으로 물고 한 발을 치켜들고 세 발로 향로의 중심을 잡고 있다.

 

대향로는 수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다. 대향로가 발굴될 당시 진흙에 묻혀 있었는데 원형을 보존하는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한다. 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사찰 내 부속 건물이라는 것과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굴된 장소가 같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창왕은 곧 위덕왕을 일컫는다. 대향로와 위덕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명분이 선명해졌다.

 

위덕왕은 성왕의 아들이다. 필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관산성 전투를 상기한다. 왕자 창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군과 전투를 위해 이만 명이 넘는 병사를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달려갔다. 성왕께서 창 왕자와 병사들을 위로차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향했다. 성왕의 행로가 적에게 노출되고 매복해 있던 일개 적군의 병졸에게 목이 잘렸다. 신라는 성왕의 목을 신라 궁궐 계단 밑에 묻고 오가면서 밟게 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좌평 네 명과 이만이 넘는 군사를 잃고 패한 왕자 창은 성왕의 비참한 죽음의 무게까지 감당해야 했다. 왕자 창은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강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위덕왕은 사비성으로 천도했던 성왕의 태평성대의 꿈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한반도의 북부를 호령했던 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고 백제의 부흥을 염원하면서 사비 백제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칭했던 성왕의 꿈을 후대에 전하고자 했을 것이다.

 

대향로에 음양의 체계를 담고자 맨 아래에 수중 동물의 왕인 용을 만들고 몸체는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과 뚜껑에는 도교를 상징하는 산봉우리와 신선을 새겼다. 그리고 꼭대기는 태평성대에 날아든다는 봉황을 배치했다. 다섯 명의 악사가 완함, , 거문고, 배소, 종적을 연주하는 모습은 자체가 백제의 태평성대라 할 수 있다.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꿈을 대향로에 새기고 백제의 태평성대를 기원했을 것이다. 성왕을 향한 가슴 아픈 사부곡을 새겼을 것이다. 대향로는 저승에 있는 아버지 성왕과 이승에 있는 아들 위덕왕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대향로가 21세기 최첨단 IT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역사상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유독 백제의 멸망은 오명으로 덧칠하고 왜곡의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의자왕은 태자 시절에 효성이 지극하여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집권 초기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으며 백제의 국력을 키웠던 성군이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 장군이 진두지휘하였던 백제군은 오천 명이었다. 오만의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의 결과는 불을 보듯 선명하지 않겠는가. 승자는 전투의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고 난도질을 했다.

 

백제의 오천 결사대와 나당 연합군 오만 명이 싸운 황산벌 전투에 대하여 묻는다. 이 싸움이 페어플레이인가? 아직도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거느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백제가 멸망했다고 말하려는가?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백제금동대향로 앞에 서면 언제나 옷깃을 여미고 할 말을 잊는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들려주는 말을 가슴으로 듣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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