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開天節, 영어: Gaecheonjeol 또는 National Foundation Day)은 대한민국의 국경일 중 하나로, 날짜는 양력 10월 3일이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한민족 고유의 명절이자 기념일이다. 하늘을 열었다는 ‘개천(開天)’이란 말은 환웅이 하늘에서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것, 혹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처음 건국한 것을 의미한다. 원래는 음력 10월 3일이었다. 이날에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하여 기념하고 있다.
개천절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1909년에 제정되어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시대에도 국내외, 좌우익을 막론하고 한국인이 있는 곳에서는 끊이지 않고 기념 되어왔다. 개천절은 단군 중심으로 한 우리 한민족의 건국신화이다.
건국신화에는 단군신화처럼 신화적 특성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온전히 ‘신화’로서 바라볼 필요성도 있다. 단군신화의 역사성에 대하여 실증적인 검증보다는 민족의 철학과 사상을 신화의 전승 과정과 시대에 따른 단군 인식의 변천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단군에 대한 인식은 한민족적의 거시적인 안목에서 접근하는 것이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다고 본다. 개천절에 즈음하여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자리 잡게 된 근대 이후로 현재까지 단군에 대한 인식의 흐름도를 간단히 소고해 봤다.
개천절은 1909년에 단군중심의 한민족운동 일환으로 기념일로 제정된다.
19010년 주권 상실 후(1910~1945)에는 국내, 국외 등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한국인 있는 곳에서 자체적으로 행사를 실시해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단군시조의 탄생지인 참성단과 개천절의 관련성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참성단이 개천절과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은 주권회복 이후부터이다.
1945년 주권회복 이후에는 개천절 봉축행사는 국내 단군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를 먼저 담당한 것은 대종교인 국민당이었다. 국민당은 1945년 10월 3일에 개천절 행사를 개최하고 단기 사용과 개천절 홍보를 결의하고 하였고, 결의에 따라서 대종교인 들이 중심된 단군 전봉건회는 대종교⋅조선 국술협회와 함께 1945년 개천절 행사를 주도하여 실시한다.
1946년에는 서울에서 채화한 성화를 참성단으로 가져와 참성단에서 기념행사를 실시했다.
1947년 개천절 행사는 ‘개천절경축위원회’가 조직되어 행사를 주관했고 이번에는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하여 기념행사를 실시하였다.
1947년 이후부터는 개천절을 관이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군정청 문교부는 적극적으로 개천절행사에 각 학교⋅관공서⋅사회단체 등 직능별로 거의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이는 개천절이 완전히 한국사회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배경이 되었다.
1948년에는 국회의장을 비롯한 다수 인사들이 참여하여 참성단 개천절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개천절 행사의 중심은 서울운동장에서 거행하는 기념식이었고, 참성단 행사는 대표성을 가지지 못했다.
1949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 한지 첫 번째로 맞이하는 개천절이었다. 이때 정부에서는 개천절을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지정하는 한편, 개천절 날짜를 음력 10월 3일에서 양력 10월 3일로 바꾸었다. 그런데 바로 이해 정부 차원의 개천절 행사가 참성단에서 거행되었고, 서울에서의 개천절 기념식은 중지되었다. 이처럼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개천절 행사의 장소가 참성단이 되었지만,
1950년에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참성단이 국가 차원의 개천절 기념식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 결과 참성단에서의 개천절 행사는 강화군 차원의 것이 되었지만, 현재까지 개천대제라는 이름으로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국경일로 매년 서울에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강화도 첨성단에서 성화를 점화하여 서울에서 기념식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단군신화>의 단군이라는 존재는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시초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삶과 관련이 있고, 현재 우리의 삶에도 많이 연관이 되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고조선」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기록의 사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연의 배려가 보이는 데 바로 『고기(古記)』 전후에 실린 『위서(魏書)』와 『당서(唐書)』 「배구전(裵矩傳)」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렇게 배치하여 서술함으로써 『고기』의 내용이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알리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를 보게 되면 그 안에 숫자로 된 기록이 많이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숫자 중에는 단순한 숫자 제시가 아닌 자료 문맥과 관련하여 의미 있게 쓰인 숫자들이 있으니, 특히 ‘삼칠일(三七日), 백일(百日)과 ‘어국 일천오백년(御國 一千五百年)’, ‘수 일천구백팔세(壽 一千九百八歲)’의 경우가 그렇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3(三)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성수(聖數)이며, 7(七)은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북방샤머니즘으로, 또 인도와 티베트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삼과 칠이 결합한 삼칠일(三七日)과 그리고 백일(百日)은 <단군신화>에서 곰[熊]이 인간(人間)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 작용한 이래, 오늘날까지 아기의 탄생에 관여하는 길한 숫자들로 인식되고 있다. 즉, 삼칠일(三七日)과 백일(百日)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길하게 작용하는 숫자인 것이다. 단군(檀君)이 나라를 1,500년간 다스렸다거나 1,908년을 살았다는 것은 한 사람의 단군이 아니라 모든 단군이 다스렸던 전체 기간이며, 모든 단군이 살았던 기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상문학학회 자료인용)
역사의 우여곡절을 다 갖고 있지만 개천절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갖게 하여 민족국가 건립과 좌와 우의 사상적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장이었다는 데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한 한민족 한국가이다. “우리는 하나다”
<저작권자 ⓒ 충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