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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 기획보도…제17탄, 고려의 일편단심 마지막 충신 최영 장군!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10/06 [13:30]

[특집]탐사 기획보도…제17탄, 고려의 일편단심 마지막 충신 최영 장군!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10/06 [13:30]

▲    정찬모 문학박사

최영 장군은 본관은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 최원직(崔元直)이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하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고려의 명장으로 양광도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해 그 공을 세웠으며, 공민왕 때는 반원개혁을 단행하고, 인당, 신순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8 ()을 공략해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1352년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護軍)이 되었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는데, 그해 원()나라에서 남정군(南征軍)을 요청하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40여 명의 장수 및 군사 2,000여 명과 함께 원나라의 고우(高郵사주(四州) 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평정했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서경을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이듬해 서북면순문사가 되었다이어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냈으며, 1361년 홍건적이 재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방실·안우 등과 이를 격퇴하고 수도를 수복하여 도형벽상공신(圖形璧上功臣) 1등으로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받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1363년 김용(金鏞)이 사주한 흥왕사(興王寺)의 변이 일어나자 우선(禹磾안우경(安遇慶김장수(金長壽)와 함께 이를 진압해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었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평리(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제조정방(提調政房)을 겸하여 가장 유력한 권력자로 부상했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 1만 명과 함께 쳐들어오자 도순위사(都巡慰使)에 임명되어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정주(定州) 달천(獺川)에서 섬멸했다.

이후 신돈이 집권해 새로운 개혁장치가 시도되면서 좌천됐으며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됐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지금의 豐德)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80년에는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었고, 이듬해 아버지에게는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판문하사(判門下事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상호군(上護軍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이 증직되었다.

 

 



그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다가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냈고,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랐다.

1388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林堅味)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이에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진입했을 때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 체포돼 유배되고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돼 참형을 당했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의 넋을 위로했다.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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