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특집]탐사기획보도…제7탄, 원종 추승사건으로 본 박지계와 김장생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7/22 [13:41]

[특집]탐사기획보도…제7탄, 원종 추승사건으로 본 박지계와 김장생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7/22 [13:41]

선조는 인조의 아버지인가, 할아버지인가?’

박지계, 사계와 원종 추승예법으로 맞서다

정원 대원군의 왕위 추증을 둘러싼 김장생과 박지계의 논쟁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이 된 경우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백부나 숙부로 불러야 한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 전에서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며 서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했다.

 

그러나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재위 1623~1649)는 또 다른 사정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할아버지인 선조재위를 아버지라 불러야 할 형편이었다.

인조반정(1623)은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재위 1608~1623)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 사건이다.

 

 돈안서원



당시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능양군)으로 폐위된 광해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것이 아니고 선조의 대통을 이은 왕으로 추대되었다.

결국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의 양자가 되는 셈이었다.

 

이를 바로 잡고자 한 사람이 잠야 박지계였다.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을 적통으로 만들어 인조가 정원군의 뒤를 이은 임금으로 등극하는 이른바 원종 추승사건은 후일 정쟁으로 발전해 몇 차례의 환국을 겪는 예송 논쟁의 전초전 격이었다.

 

조선 왕조때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아버지 대원군은 모두 4명이다.

이들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이다.

 

이들 가운데 생전에 아들이 왕으로 등극한 사람은 흥선군 이하응뿐이고 다른 세명은 모두 사후에 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잠야사장(영조시대 박필주가 쓴 박지계의 행적)

앞서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중종의 서자(7)으로 창빈안씨 소생이다.

그는 3(하성군)인 아들 선조가 후사가 없던 명종의 계대를 이어 왕이 되자 사후에 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조선의 왕들 가운데 선조는 최초로 직계가 아닌 방계 출신의 왕이 되었고 이는 선조로 하여금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승 하고자 시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선조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도 역시 선조의 5남으로 후궁이었던 인빈 김씨 소생 정원군을 아버지로 두었던 점에선 선조와 같다.

 

하지만 인조는 선조와 달리 광해군의 계대를 이을 수는 없었다.

광해군은 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났으므로 당시 역사에선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조는 공식적으로 선조의 뒤를 이은 왕이었다. 이로 인해 복잡한 가계도가 형성되었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왕통이은 것으로 당시의 예법은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이 선조와 정원대원군은 인조의 입장에서 보면 부자관계에서 형제관계로 변하게 된다.

박지계는 이런 모순을 지적해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승해 선조의 후사를 잇게 하는게 맞다는 주장을 했다.

 

박지계가 내세운 원종 추승문제는 당시 예법의 대가 였던 사계 김장생과 대립하게 되고 박지계는 시류에 영합했다는 비난을 사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결국 원종 추승문제는 10년의 논의 끝에 인조의 주장에 따라 정원대원군을 원종으로 추증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사후에 왕으로 추증되는 인물인 원종이 탄생한다.

사계 김장생은 예학의 종장으로 불리며 영남의 한강 정구와 함께 조선 후기 예학의 쌍벽을 이뤘다.

 

잠야는 내포지역을 대표하는 예학자로써 사계나 정구와 함께 당시 예학을 통해 왕위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원종 추승 사건의 승자였지만 낙향하여 선비 길을 걸었던 권력에 결탁하지 않은 인물로 남았다.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뉴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