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 행재궁(行縡宮) 화축관(華祝館) 재현(再現) 조성(造成)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21/06/10 [08:05]

天安 행재궁(行縡宮) 화축관(華祝館) 재현(再現) 조성(造成)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입력 : 2021/06/1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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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천안과 직산은 삼남으로 통하는 통로로 사행(使行)과 관원(官員)의 빈번한 왕래가 있었다. 온양온천과 인접해 있어 왕과 왕실의 행차가 빈번했다. 천안에는 화축관(華祝館) 영남루(永南樓) 유적이 남아 있고, 직산에는 영소정(靈沼亭) 터가 전해온다.

 

화축관은 상감이나, 중전, 왕자, 공주의 온천행사시에 유숙하시던 행궁(行宮)이다. 현종 6年에 상감께서 온천에 행사하신 후 왕실 행차가 자주 있었다. 따라서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에서 다투어 아림 하실 객관을 수축하였다.

 

천안의 정관(正官)은 행궁(行宮)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4년 뒤 1601년(선조 34년)에 군수 노대하(盧大河)가 행궁(行宮) 화축관(華祝館) 33칸을 세우고 높은 언덕이 있어 조망이 광활하고 바람이 서늘하여 납량이 알맞은 곳에 화축관(華祝館) 문루(門樓)인 영남루(永南樓)를 세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기울어 개축이 시급하였다. 이에 현종 7년(1666년) 조경빈(曹敬彬)이 현감으로 도임하여 행궁(行宮)을 개축한다.

 

군수가 일러 상감께서는 검소하신 분이라 흙벽에 띄로 이은 집이라도 평안히 여기시지만 거자(擧者)의 도리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다하였다. 군내의 부노(富老)와 합의하고 상관의 허락을 받아 행궁을 다시 짓기로 하였다. 이때 충청감사 임희백(任犧伯)의 도움이 컸었다고 한다. 먼저 정관을 세우고 다음으로 성아실(聖御室)과 군청 무고(武庫) 등을 세웠다. 또한 충청감사 임희백의 후임으로 도임한 감사 민유중(閔維重)(여양 부원군)의 수리 지시로 서헌(書軒)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소읍의 행궁으로는 보기 드문 웅장한 행궁을 세우게 되었다.

 

이 행궁을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준 분은 멀리 경상감사 이태연(李太淵), 수군통제사 이기형(李祈馨), 김경(金鏡), 충청병사 이원노(李元老), 전라병사 민진익(閔震益) 등으로 이곳 천안은 커져가는 삼남의 고관들이 모두 재물을 내놓아 천안객관이 세워진 곳이다. 그리고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기문(記文)을 짓고 행궁의 이름을 화축관이라 하였다.

 

화축관의 뜻은 옛 중국의 제요가 화(華)란 곳을 가보시고 화인(華人)의 수부다남자(壽富多男子 ; 오래 부유하게 살면서 아들도 많음)를 축원하였다 한다. 이제 우리 성상 현종(顯宗)께서도 원하시는 것이 바로 연년 풍년들어 백성이 풍요한 생활을 하고 예락(禮樂)이 발전하는 것이므로 제요가 화인(華人)의 수부다남자를 축원하신 고사에 따라 화축관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역대 많은 임금님들이 천안의 행궁(行宮)을 다녀갔다는 기록에는 고려 현종9년(1018년), 조선태조6년(1396년), 태종16년(1416년), 세종15년( 1433년), 세종23년(1441년), 세종24년(1442년), 세종25년(1443년), 세종27년(1445년), 세조3년(1457년), 세조10년(1464년), 세조11년(1465년), 세조14년(1468년), 인조2년(1624년), 현종6년(1665년), 현종7년(1666년), 세종8년(1667년), 세종9년(1668년), 세종10년(1669년), 숙종43년(1717년), 영조8년(1732년), 영조26년(1750년)이 있다. 1750년 영조26년 9월26일 온양 행차 때에 행군의 문루인 영남루에 올라 억석감회(憶昔感懷)란 4자를 친히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 한다.

 

이 화축관은 세상에서 행궁이라고 불렀으며 행궁에서는 어진(御眞)이 모셔져 있는 영당(影堂)이 있어 군수가 음력 초하루, 보름, 삭망(朔望)에 참배하였다고 한다. 어진은 어는 왕의 어진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이 객사에 자주 머무르신 현종의 어진일 것이다.

 

화축관의 위치는 지금 중앙초등학교 앞 천안군 관아(官衙) 중앙에 세워졌다. 일제는 1913년 천안의 중심 천안군 관아(官衙)를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일본인 공립심상소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천안의 정기(精氣)를 눌러 놓으려는 속셈이었다.

 

경술망국 후 일인들은 성역(聖域)일 수 있는 화축관이 민거로 변한 뒤 헐대로 헐어서 어괴(御壞) 직전에 있었다. 이것을 광복 후 보수하여 체육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남산 위에 일부를 옮겨 정자(亭子)를 세웠다. 지금 용주정(龍珠亭)이라고 불리 운다.

 

천안의 화축(華祝), 황룡(黃龍)에 세운 영남루(永南樓)는 1991년 후 일인학교운동장 서쪽에 옮겨 세워졌다가 일인들 경찰서 숙사 헌병사무실로 사용하다가 일인학교 관사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도 국민학교 사택으로 사용하다가 1959년에 삼룡동 삼거리공원 호수가로 이전하고 단청하여 관광객의 쉴 장소로 마련되었다.

 

그리고 지금 영성동(寧城洞) 남산공원 동쪽 끝자락 길가에 나그네들, 길손들 편의를 위한 객관(客官)과 남원루(南院樓)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 명신 이항복(李恒福)의 수선정기(水仙亭記)에 따르면 관아좌편에 아담한 연지가 있는데 못 둘레에 방림이 우거져 있고 못 가운데에는 흙을 쌓아 그 위에다가 수선정자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시대에 이 연지를 메우고 면화와 잠사 공판장을 세웠다. 지금 중앙시장(천일시장) 자리이다. 이제 화축관 영남루의 영화(榮華)는 사라지고 그 기문(記文) 만이 남아서 옛 영화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감회(感悔)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천안 행재궁(行縡宮) 화축관(華祝館)이 재현(再現) 조성(造成)이 추진되고 있다.

 

화축관은 화봉삼축(華封三祝) 또는 화축삼다(華祝三多)의 줄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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