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탐사기획보도…제1탄…계백, 백제와 함께 산화(散花)한 이름!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 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6/09 [10:37]

[특집] 탐사기획보도…제1탄…계백, 백제와 함께 산화(散花)한 이름!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 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6/09 [10:37]

 

 김인희 시인/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계백장군, 그는 누구인가?

그는 백제의 멸망 위기에서 오천 결사대를 진두지휘(陣頭指揮)하여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웠던 장수요, 전쟁터로 가기 전에 처자들을 패전 뒤 적국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여 자기의 손으로 죽인 가장이었다.

 

계백장군은 역사 속에서 멸망한 나라 백제와 비극의 운명을 같이한 인물이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으로 백제는 폭풍 앞에 놓인 촛불이 되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탄현과 백강에서 패배하고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의자왕은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계백 장군에게 붙이고 백제를 구할 것을 명한다.

 

계백장군은 5천 결사대와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 5만과 맞서 싸우면서 병사들에게 외쳤다. “옛날에 월왕(越王) 구천(句踐)5천 명의 군사로 오왕(吳王) 부차(夫差)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그리고 제군들이여, 부디 살아서 부모와 처자에게 돌아가라.”

 

 계백 장군

계백은 불꽃같이 엄중한 장군이었고 부모와 처자를 사랑한 뜨거운 효장(孝將)이었다.

계백장군이 지휘한 5천 결사대는 나당연합군 5만 군사와 4차례나 싸워 이겼다.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이 백제군 진영에 왔을 때 계백장군은 투구를 벗기고 어린 관창을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이 재차 백제군 진영에 왔을 때 그의 목을 베어 돌려보냈다.

 

나이 어린 화랑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의 전사로 사기에 오른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패배당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적의 화살이 계백의 심장을 뚫고 적장의 칼이 목을 베는 순간까지 백제국을 향하여 피어난 붉은 꽃의 거룩한 산화(散花), 계백이여!

 

삼국시대의 역사서의 대명사라 일컫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계백장군에 대한 기록은 황산벌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국한되어 있다.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 (충남 부여군 궁남지 화지산 앞)

심히 안타까운 것은 백제본기와 계백 열전에 쓰여있는 내용보다 신라의 기록에서 관창 열전 등에서 오히려 계백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계백에 대한 기록은 철저히 전쟁의 승자였던 신라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 역시 계백의 적대국인 백제국의 장수였지만 계백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겠다.

 

계백의 행동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분분하다. <동국사략>을 저술한 고려말 조선초 유학자 권근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가족을 순으로 죽인 그를 인륜을 배반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조선 후기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은 죽지 않는 것이 몸을 보전함이 되는 줄만 알고, 죽는데 마땅함을 얻는 것이 몸을 보전함이 되는 줄은 모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계백은 결코 후대에게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그의 선택은 죽음뿐이었다. 그때 그의 죽음만이 최선의 윤리였고 최후의 애국이었으리라.

 

천사백 년 동안 우리의 핏줄을 타고 면면히 흐르고 있는 그이 뜨거운 DNA가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탱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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