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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은 고 김윤회 선생!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국가 독립유공자

편집부 | 기사입력 2020/09/09 [11:38]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은 고 김윤회 선생!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국가 독립유공자

편집부 | 입력 : 2020/09/09 [11:38]

 

고 김윤회 선생의 뒤늦은 국가 독립유공자 선정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됨과 동시에 창씨개명, 신사 참배 등 조선민족 말살 정치의 치욕스러운 일제 강점기는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그 수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해방된 지 75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곳곳에 남아 있는 친일잔재, 식민지 잔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우리 후손들이 풀어야 할 과제는 아직도 산재해 있다.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대리전이 되었던 6.25 전쟁, 독재에 맞선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등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대한민국의 비극은 여러 후유증만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독립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이미 작고하고 세상에 없는 숨은 국가 독립유공자의 공로를 치하하고 찾아내는 일은 국가가 아닌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1950년 6.25 당시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무참히 희생당한 국가 독립유공자 고 김윤회 선생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생을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배재되었으나 후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70여 년 만에 국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김구 선생과 같은 문중으로 선친을 통해 교류하며 친밀감을 유지하던 인물

 고 김윤회 선생의 항일의식은 성장과정에서 선친 고 김재춘 옹으로부터 배어온 것이다. 그가 어린 학생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봉에 서서 항일의식을 불태운 환경적인 배경에는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항일투쟁의식이 투철했던 그의 부친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 김윤회 선생의 선친인 고 김재춘 옹(1879~1957)은 백범 김구(1876~1948) 선생과는 같은 안동 김 씨 문중으로 종중회에서 수시로 직접 교류하며 친밀감을 유지하던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평소 강한 항일의식으로 일본에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족에서 평등을 요구하는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인권국가로 바로 서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만민이 평등해야 한다” 는 “만민평등사상”이 투철했다.

 

각 지역민들 간의 화합정신과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후세교육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910년 한. 일 합방 전후엔 충남도청 소재지 공주 “수전소(收錢所)”에서도 활동하며 경북 문경, 충북 괴산, 충남 공주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인옥 선생(공주시에서 1981년 국가 독립유공자 선정)과 교류하며 중국 상해 임시 정부 등에서 독립자금 모금 운동과 지원활동 등으로 국가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썼다. 이런 부친의 소리 없는 활동으로 숭고한 독립을 향한 숨은 활동으로 고 김윤회 선생의 강한 항일의식을 싹 틔우기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어린 조선학생들에게까지도 행한 감당할 수 없는 차별적 행태에 대한 강한 반항 의식은 자연스럽게 학생운동 및 사회활동 등으로 이어져 해방 후까지도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지역민들의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선친의 소유지에 현 송간초등학교 전신인 부여 보통학교 부설 송 간간이 학교를 유치하는데 노력하였다.

 

 



국가 독립유공자 고 김윤회 선생의 학창 시절 활발한 학생회 활동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고 행정, 입법, 사법 및 군까지 장악하여 우리 민족을 무참히 탄압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런 잔혹한 일제의 탄압에도 당당히 맞서 목숨을 걸고 항거 투쟁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한 갖은 혼신의 노력을 다 하였다. 이렇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기에 뒤늦게 금번 제75주년 광복절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 받았다.

 

국가 독립유공자 고 김윤회 선생은 1913년생으로 일제 강점기 때 중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여 공립 보통학교 졸업, 공주중학교(4년제 학제) 재학 중 퇴학, 1932년 3월 공주 사립 영명학교를 졸업하였고 동년 4월 경성 사립 법정 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전신)를 입학하였으나 일본 정보경찰들의 집요한 사찰로 동교를 졸업하지 못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중학교 재학 시절 항일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으며, 1933년 8월 “학교 내 독서회” 조직, “조선 학생과학 연구회” 등 활발한 학생단체 활동을 하였다. 당시 고 김윤회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동향 사찰을 피하기 위해 이명(한상훈, 한상철, 임택수, 김락철, 김철환 등)을 사용하며 활동했으나, 결국 일본 경찰에게 1936년 7월 경성 검찰국에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경성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투옥되었다. 그 후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은 치열한 항일투쟁으로 종로경찰서, 강경경찰서, 공주경찰서, 부여경찰서, 신의주 경찰서 등 전국적으로 지속적인 수배로 결국 신의주 형무소에서도 재차 수감되었고, 1950년 6.25 전쟁 시 겨우 37세의 안타까운 나이에 미결수로 대전형무소 수감 중 공권력에 의해 대전 소재 산내면에서 무참히 학살당했다.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으로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기까지 고 김윤회 선생의 첫째 아들 김태만은 10여 년 전 부친을 국가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였으나 선정되지 못한 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고 김윤회 선생의 국가 독립유공자의 수훈을 위해 손자 김정관(현 서부발전소 근무)과 수훈자의 집안 동생인 김경회(행정학 박사 전 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전 대통령 직속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지난 2020년 8월 15일, 제75주년 광복절을 기념하며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건립에 이바지 한 공으로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족장을 당사자인 고 김윤회 국가 독립유공자를 대신하여 그 유족인 손자 김정관이 대리 수상하였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바람직한 우리의 자세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피눈물 나는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후손들은 역사를 마주할 때 일제 강점기 시기에 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던 국가 독립유공자들의 희생을 기리고 오늘의 평화로운 일상을 있게 해 준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 독립유공자는 제대로 된 예우조차 없이 아픈 역사를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조차 힘들었던 국가 독립유공자의 명복을 빌며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감사와 위로를 정부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더 좋은 국가독립유공자들을 위한 정책 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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