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은 시점은 이 무렵이었다. 1960년 4월 12일의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김주열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며 선거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국무 위원들에게 물었다.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은 없는가?”
양심이 살아있었다면, 그때 소위 장관이라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했어야 했다. 사실은 부정 선거였고 부작용이 있었고 불의가 저질러졌다고, 대통령 모르게 우리들이 일을 꾸몄다고, 더 사태가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자백했어야 했다.
하기야, 양심이 살아있었다면 애시 당초 그런 짓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간파한 이승만은 이런 말을 남겼다. “대통령을 사임하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에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이승만의 비판하는 이들은 흔히 지나친 권력욕을 지적한다. 정치인에게 권력욕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후의 장면에서 보여지듯, 이승만에게는 권력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다. 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부정 선거 사태를 접하게 되자, 즉시로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과 귀는 가리워져 있었다.
시시각각, 정권의 최후는 다가오고 있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평화로운 집회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데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깡패들이 습격했다. 자유당 집권 내내 악명을 떨친 정치 깡패들이었다. 그것은 자유당 정권의 종말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나라가 깡패들을 동원해서 정의를 외치는 학생들을 구타했으니, 민심이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인 4월 19일 대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가 서울을 뒤덮었다. 국민들은 더 이상 이승만 대통령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군중들은 국회 의사당에서 경무대로 진격했다.
바로 그 시각에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하는 자유당의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다. 사태의 심각성은 알아가면서도 원인은 모르고 있던 이승만이 발언했다. “오늘은 내가 이거 무슨 난중(亂中)에 앉아있는 것 같애. 사람들이 나를 나가라고 하는 모양인데 순순히 좋게 내주려고 해. 나는 무슨 이유인지”.
그 지경에 되었는데도 장관들은 여전히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했다. 홍진기 내무부 장관은 “마산 사태는 1차로 민주당이 선동했고 2차로 공산당이 조종한 듯하다”고 보고했다. 최재유 문교부 장관은 “학생들은 선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배후 조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발언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공산당에게 뒤집어 씌운 잘못된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 피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반공 세력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반공을 말하면, 곧이듣지 않고 무언가를 은폐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공산화를 추진하는 세력이 있는데도, “반공 조작”으로 듣는다.
경무대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경무대 안에서는 장관들이 공산당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었고 밖에서는 국민들이 혁명을 하고 있었다. 국무회의에서는 거짓말이 난무했고 거리에서는 진실을 향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마지막 회의에서까지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국무 위원들은 4월 21일 모두 사표를 제출했다. 아마 그때쯤은 이승만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승만은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에게 사퇴를 요청했다.
4월 22일 이승만은 시위로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한 병실을 방문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고 안타깝고 슬픈 장면이었다. 기묘한 점은 노인 대통령과 젊은 학생들이 서로를 향한 적의(敵意)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다치게 한 권력자를 향해서 분을 낼 법도 하고, 본인더러 물러나라고 한 학생들에게 화를 낼 법도 한데, 그 자리에선 분도 없었고 화도 없었다.
피 흘리며 신음하던 학생들은 대통령을 보고 일제히 외쳤다. “할아버지!” 아마 학생들도 알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는 이승만의 잘못이지만,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대통령이 부정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데모하다가 다쳐서 상한 다음에도 이승만은 여전히 젊은이들의 할아버지였다.
그날, 이승만도 울었고 학생들도 울었다. 다친 학생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면서 이승만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그 기막힌 순간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이 나라가 있었고 백성이 있었다. 4월 25일에는 상아탑을 지키던 교수들이 일어났다. 서울 시내 250여 명의 교수들이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서명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고려대 교수 이항녕(李恒寧)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당시 교수들 분위기가, 이제 붙들려가도 상관 없다는 의식이 생겼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써서 깃대를 만들고 대형 태극기를 준비해서 시위했다. 국회까지 행진하는데 학생과 군중이 수만 명이었다. 가다가 구호를 부르는데 조윤제(趙潤濟)가 ‘이 대통령 물러가라. 대법원장 물러가라’고 말했다.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가 처음 나왔다. 그때까지 그런 구호는 없었다.”
이항녕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한 구호는 4월 25일에야 나왔다. 그전까지는 부정을 비판하고 자유당을 비난하며 부통령을 다시 뽑아야 한다면서도, 대통령 물러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이 각별했다는 증거이다.
국부(國父)로 추앙받던 이승만에게 최초로 하야를 요구한 인물, 조윤제는 저명한 국어 학자였고 민주 투사였다. 흔히 한국인의 특질을 “은근과 끈기”로 표현한다. 은근과 끈기를 대표적인 우리 민족성으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조윤제이다. 은근과 끈기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민족의 정신이 마침내 혁명으로 폭발 현장에, 바로 그가 있었다.
조윤제는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지었다. “생어민족 사어민족(生於民族 死於民族)” 살아도 민족을 위하여, 죽어도 민족을 위하여, 가슴에 민족을 품었던 한 생애의 찬란한 문장이었다. 4.19를 선과 악의 대결로만 보면, 영혼을 울리는 역사의 메아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승만은 악이요 시위대는 선이라고 매도해버리면, 역사의 깊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4.19 혁명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민족을 위해서 살고 죽은 이승만에게 역시 민족을 위해서 살고 죽은 조윤제가 퇴진을 요구했다. 목숨을 걸고 맞붙은 양쪽이 모두 애국자였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상가들이었으며,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역사란 이처럼 깊은 것이다.
4월 26일은 “승리의 화요일”이었다. 새벽부터 대규모 군중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날, 남산(南山)이 있었다. 시인 서정주는 젊은 날 전기를 쓰기 위해서 이승만을 자주 만났다. 가끔 이승만은 자신이 쓴 한시를 들려주곤 했다. 서정주에게 이상 깊었던 시에 남산이 등장한다.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 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 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더라만 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대통령의 시 낭송을 듣던 서정주는 순간, 가슴이 복받쳐 오르며, 눈물이 났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조선 말기부터 이 나라 자주독립운동의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기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가슴 속에 못 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서울의 남산! 그 남산!”
운명의 그날, 이승만은 묵묵히 남산을 바라보았다. 기약 없는 망명 생활에서 꿈에도 그리워했던 그 남산이었다. 시민 대표들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했다. 이승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돼, 그게 우리 민주주의니까...” 그로써, 이승만 정권 12년은 끝났다. <저작권자 ⓒ 충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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