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시작되었다. 연휴의 의미는 연이어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의미 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력의 빨간 날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금번의 연휴에는 추석에 대하여 연원을 알아보는 의미있는 중추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학계(국립박물관,유안공,노용환 등,역사민속학자)의 자료를 인용하여 추석에 대하여 소고하여 보았다.
한국에 있어서 8월 15일은 조상제일이었다. 이 전통은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에서는 그 날 오시(11~익일1시)에 제사지냈다고 하고, 가야에서도 시조 수로왕과 그 아들 거등왕 이하 9대손 구충왕까지를 사당에 배향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이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라와 가야로 대표되는 남부지역의 토착문화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계승되었다.『고려사』의 에 의하면 "경령전(景靈殿)에서는 정조, 단오, 추석, 중구에 친전의(親奠儀)를 행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경령전은 고려 역대 임금들의 초상(肖像)을 봉안한 사당 건물을 말한다. 즉, 왕들은 명절이 되면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1190년(명종 20) 왕은 친히 경령전에 가서 제향했다.
이처럼 왕실에서는 이 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민간에서도 이날 조상의 무덤에 성묘를 했다. 고려말의 문신인 이색(李穡: 1328-1396)은 자신의 문집인『목은선생문집(牧隱先生文集)』에서 "성묘는 중추절에 미쳐 가려고 하니 서로 만나 밝은 달이나 구경했으면 하네"라는 구절을 남겼고, 같은 시기의 문인 원천석(元天錫: 1330)도 그의 문집『운곡행록(耘谷行錄)』에서 그 날 선산을 찾아 "형제가 줄 지어 같이 절을 올리니 저승에서도 이승과 같이 함께 기뻐하시네"라는 시구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추석은 죽은 조상을 찾는 날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조선시대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김매순(1776-1840)의『열양세시기』에 그 날 묘제를 행하는데, 한식 때보다 더 많이 행한다고 하면서, “유자후가 병졸과 노복과 품꾼과 걸인 모두가 부모 묘를 찾게 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오직 이 날이 그러하다.”고 하는 기사가 있다.
또한 유만공(1793~1869)의『세시풍요(歲時風謠)』에도 그 날 “집집마다 한식처럼 성묘하러가니 달 밝은 중춧날 감개한 정이더라.”는 노래 대목이 있다. 이처럼 추석은 조상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한국 추석의 제사밥으로 여러 음식들이 있다. 앞에서 본『열양세시기』에 의하면 이 날272 日語日文學 第50輯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의 가난한 집이라도 으레 제상에 바치는 안주와 과일은 분수에 넘치게 가득 차린다. 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홍석모(1781~1857)의『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제사밥으로 송편, 시루떡, 인절미, 밤단자(栗團子)를 꼽고 있고,『농가월령가』에는 신도주(新稻酒), 오려송편, 박나물, 토란국 등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때의 제사밥으로는 논작물과 밭작물로 구분이 된다. 송편, 시루떡, 신도주는 논작물에 속하지만, 밤단자, 토란단자, 토란국, 박나물은 밭작물에 속한다.
즉, 추석은 논작물과 밭작물의 수확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논작물 보다 밭작물적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 그 이유는 벼가 수확되지 않으므로 남이 농사지은 햅쌀을 구해 차례를 올리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가 아니어서 추석을 명절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추석을 억지로 벼 수확제로 하기 위해서 덜 익은 벼를 미리 베어서 말렸다가 방아를에 찧어서 햅쌀을 만들어 밥, 떡, 술을 만드는 곳도 있었다. 이처럼 추석은 벼의 수확기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수확제라고 본다는 전작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8월 15일은 미래의 농사를 예측하는 날이기도 했다. 가령 한국의 경우 추석날 일기가 청명해야 좋다고 했고, 그와 반대로 비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고 해서 불길한 징조로 삼았다. 그리고 밤에 구름이 끼어 달빛을 볼 수가 없으면 보리와 메밀이 흉년이 들고, 토끼도 새끼를 배지 못하고, 개구리가 알을 배지 못한다고 한다. 또 추석날 밤에 흰 구름이 많이 떠서 여름에 보리를 베어서 늘어놓은 것처럼 벌어져 있으면 농작물이 풍년이 들지만, 구름덩이가 많거나 구름이 한 점도 없으면 그 해의 보리농사는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하고, 구름이 적당히 떠서 벌어져 있으면 풍작이라고 했다. 이처럼 한국은 추석이 청명해야 보리와 메밀농사가 좋고, 그렇지 않고 구름이 잔뜩 끼어 달이 빛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흉작을 예고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달은 물을 상징한다. 세계의 신화 속에 나타나는 달은 영원한 생명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달은 물을 가지고 있는 농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줄다리기의 줄은 물을 관장하는 용사(龍蛇)를 의미한다. 이처럼 물을 매개로 달과 줄다리기는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보름에 줄다리기가 행하여지는 것이다. 원무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강강술래가 충무공의 의병술(擬兵術)의 하나로 창안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의 “强羌水越來 또는 江江水越來”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바다 저편에서 오는 방문신을 맞이하는 춤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한국의 추석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가 있었는데,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월적인 측면에서는 달문화를 즐겼다고 할 수 있다. 달은 생명수로 농절기에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이 날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조상의 영혼과 만나는 날인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추석이 고대로부터 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고유의 명절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상에 대한 숭배의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에 추석은 한국의 문화로 계속될 것이다.
셋째, 농경적인 측면에서는 수확제와 예축제적인 요소가 있었고, 또 그 날의 날씨를 통해 농사의 길흉을 예측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날에 토란을 수확으로 토란을 상징으로 하는 밭작물의 수확제이었던 것이다. 토란은 밭작물의 대표로 보았다고 생각된다.
넷째, 중추제의와 유희적인 측면은 줄다리기와 원무는 달을 통해 물과 용사신앙과 결부되어 생겨난 15일의 놀이였다. 달은 생명수이었고 생명수와 인간을 잇는 줄다리기 문화와 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달모양의 원무는 한국인에게 춤 문화를 가져왔다고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추석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전통문화 중 하나이다. 따라서 8.15일은 조상을 돌이켜보는 민족 최대의 고유 명절이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충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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