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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기획보도ⵈ 제18탄,별 볼 일 있는 실학자 홍대용!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 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10/13 [22:54]

[특집]탐사기획보도ⵈ 제18탄,별 볼 일 있는 실학자 홍대용!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 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10/13 [22:54]

 

안창옥(해솔문화다큐재단 이사장/충남신문 칼럼니스트)

1. 홍대용 유적을 찾아

 

(홍대용 과학관 스케치 배상섭 화백)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로 가는 길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길은 유명한 병천 순대국밥이나 청주 국제공항을 오갈 때 여러 번 오간 일이 있어 친근한 길이다. 6월의 끝자락 오후 날씨는 쾌청하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어 목가적인 풍경이다.

 

홍대용 과학관 표지를 따라 장산리로 들어가는 도로에 들어서자 도로 양옆으로 마치 초록 색의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질서정연하게 심어진 모가 자라고 있다. 그 녹색 카펫을 시샘이라도 하듯 흰색의 비닐하우스가 들어서고 생가지 입구에 세워진 한시가 손님을 맞이한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조선 후기인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자 이다. 자는 덕보(德保), 혼은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북학파 박지원, 박제가 등을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 장려에 치중하였다.

 

2. 홍대용의 생애

 

박지원은 홍대용의 빈소 앞에서 술이 곤드레가 되어 있었다. 통곡하다가도 술 사발을 당겨 마셔대곤 했다. 이런 그에게 상주는 고인의 묘지명을 써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써 갈겨 댔다.

 

아아, 슬프도다. 덕보(홍대용의 자)는 툭 트이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며...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해 그의 학설이 오묘하고 깊었다.

 

박지원은 묘지명의 격식을 무시하고 에세이 쓰듯 자유분방하게 표현했는데, 이글이 홍덕보 묘지명이라는 글로 천하의 명문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 글에서 박지원이 가장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홍대용의 과학사상 중에서도 자구의 자전설이다. 홍대용이 주장한 지전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박지원이 그 설의 심오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박지원 같은 지기들이나 귀를 기울이고 알아주었을 뿐 조정 대신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지구가 돌면 어쨌다는 거냐?”라거나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은 만고의 진리인데 한낱 괴담을 늘어놓는다고 나무라면서 욕질만 했을 뿐이었다. 290년 전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고 별에 그의 이름을 헌정했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런 세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학 탐구에 생애를 바쳤다. 박지원은 홍대용과 막역한 사이였고 북경을 다녀온 을병 연행록을 모델로 유명한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홍대용을 스물여섯 번 언급할 만큼 그를 존경했다.

 

홍대용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출세가 보장된 입장이었지만 당시 양반 자제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는 서당보다 당시에는 잡학이라 여겼던 과학기술을 공부하는 김원행의 석실서원에서 공부하여 실학과 예술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다.

 

3. 북경방문과 을병연행록

 



1765년 그가 35세 때 숙부 홍억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하여 다녀오게 된다. 그는 청나라가 물질적으로 번영하고, 새로운 시대를 직접 견문하고, 우리나라도 많은 부분에서 각성하고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북경을 다녀와 을병연행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를 보고 후에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게 되었다.

 

홍대용 영조41(1765) 겨울부터 1766년 봄까지 작은아버지 홍익이 청나라에 갈 때 연행사의 일행 군관으로 수행하면서 한글로 쓴 사행일기(기행문)이다. 중국 여행의 숙원이 이루어진 기쁨, 아버지 등으로부터 받은 전별시, 자신의 중국관, 고향에서 의주까지 이루는 국내 노정에서의 이야기를 간략히 언급하였다.

 

작자의 다른 학문 여행기인 [담헌연기 湛軒燕記]가 종전의 규범적 표현을 벗어나 사실 전달에 힘 쓴 것에 비해, [을병연행록]은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나 개인적 감회를 정감 있는 필치로 자세히 다루고 있는 국문으로 쓰여진 여정기로 가치가 높다.

 

홍대용이 북경에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중국 실학자들과 교류한 것은 특기 할 만하다. 특히 천주당 북경천문대의 방문은 천문연구에 크게 눈을 뜨게 하였다. 당시 천문대는 황제의 상징으로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으나 정중한 편지를 써서 3일만에 방문 허락을 받았다. 귀국할 때 망원경을 사 와서 천체 관측에 활용했다.

 

천안시 병천면 수신면 장산리 그가 태어난 생가터 옆에 홍대용 과학관을 천안시에서 설립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나도 여러 번 과학관을 방문하였는데 갈 때마다 그의 위대한 정신과 행적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4. 공관병수 철학

그는 많은 업적과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겼는데 요약해 보고자 한다.

그는 공관병수 公觀倂受 철학을 주장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명심하고 받아들여야 할 철학이다. 모든 것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보고, 다른 것도 인정하고 널리 받아들여야 하는데, “내로남불이라는 말에서 보듯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현실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롭다는 지침을 300년 전에 이미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변화기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시대정신으로 공정, 정의, 융합 등이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홍대용의 공광병수 정신이 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현대판 실학 정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갓을 쓴 천문학자라는 표현과 같이 그는 그 당시 상상하기 어려웠던 천문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추구했고 주장했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기 위해 집 마당에 농수각이란 천문대를 지어 우주를 관측했고, 천문 과학 기구를 제작했다.

 

5.홍대용 정조와 겨루다.(계방일기)

 


계방일기1774(영조50) 121일부터 1775(영조 51) 826일 까지 300여일 동안 홍대용이 세손의 서연에 드나들며 정조와 나눈 문답을 기록한 책이다. 정조의 공부방에서는 유교경전을 텍스트로 강론을 벌이며 조선 최고 지성들의 학문의 깊이와 사유의 폭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문답이 오간다. 여느 경연일기나 서연일기와 달리 방안 풍경, 세손의 표정, 잡담갈을 소소한 일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홍대용은 노론의 맥을 잇는 정통유학자 였다. 하지만 학문을 위한 학문이나 과거를 위한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학문 즉 실용실행 實用實行을 중요시했던 과학자였으므로 실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학에도 능통했고 거문고도 잘 타는 멋지고 유유자적의 삶을 살았다. 나는 그분의 업적을 선양하고 공부하기 위해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노력하고 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태어난 곳 인근인 상록리조트 옆에 고이 잠든 홍대용 선생을 선양하는 일에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사행시로 끝맺고자 한다.

 

천안고을 수신에서 홍대용 님 태어나서

공관병수 철학으로 융합학문 이루시고

현실에서 도움 되는 실용학문 과학기술

의산문답 을병연행 길이 남을 명저로다.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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