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곡(思父哭)

충남신문 시민문화기자 수습과정 정경숙

편집부 | 기사입력 2021/09/29 [09:53]

사부곡(思父哭)

충남신문 시민문화기자 수습과정 정경숙

편집부 | 입력 : 2021/09/29 [09:53]

  

 

 

“경숙아! 저녁 먹고 가라.”

 

“아버지 저 바빠서 지금 가야 해요. 죄송해요. 고기는 엄마랑 두 분께서 드세요.”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그땐 왜 느끼지 못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버지가 담고 있는 의미 있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배가 불러 소화제를 먹는다 해도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텐데...

 

지난 시간 강사님의 강의를 수강하며 강사님이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강의하는 것을 들으며 내 가슴속에 항상 아버지께 못다 한 죄송함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가난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나는 위로는 오빠 밑으로는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 둘, 지금은 덜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장남이 잘되어야 그 집안이 잘 된다고 아들에게 기대가 크던 시절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오빠는 고향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무엇이든 본인이 하고자 하면 하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내가 공부를 잘한다 한들 그런 오빠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오빠는 엄마의 기대치가 되었고 나는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

 

오빠는 대학교 나는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시기가 겹치며 나는 울며 고등학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와서 나를 계속해서 부르셨다. 처음에는 “네”라고 대답하고 가면 “아니다, 가서 공부해라” 항상 술만 드시면 하시는 말씀 “공부해라,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은 아무것도 손대지 마라”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말씀을 하며 손을 저어 보이시다가도 다시 반복적으로 부르면 내 대답도 “네” 에서 “왜~유”로 바꿔가며 짜증을 내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달랐다.

 

가난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 본인 자신을 자책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안쓰러워서 그런지 자꾸만 내 이름과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찾으시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인생에 비하면 복 받은 인생이라 생각하면서도 왜 우리 집은 다른 집에 비해 어려울까?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시는데도 가난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1년 동안 열심히 일해 오빠 등록금과 가정에 생활비로 모두 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 교복을 입고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내 가슴 한쪽에 있는 나의 꿈을 버릴 수가 없어 매일매일 고민과 번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 학교 이야기를 하며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나의 의지를 막지 못했고 중학교 때 성적으로 고등학교 입학 당시 3년 장학생으로 당당하게 고등학교를 입학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우리 집은 오빠의 대학 학비와 4남매의 학비로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의 노력에도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매일 힘든 일로 지치신 부모님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가슴이 더욱 아려왔다. 그냥 취업전선에서 일해 가족에 도움이 되어줄 걸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대학 입시 시험을 보려고 할 때 엄마는 반대하시며 입시 시험에 치를 돈을 주지 않아 등교하지 않고 울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다가와 얼마면 되는지 물어보고 아버지 주머니에서 몇 번을 접어 넣어 꼬깃꼬깃해진 돈을 펼쳐 주시며 빨리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그 돈을 받아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친구들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입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대학은 정말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 더 이상 내 꿈을 내세우며 부모님을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내 꿈을 접고 사회생활을 하며 받은 돈은 부모님께 다 보내야만 했고 지금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될 때 아버지는 예식장에서 신부를 보내야 할 타임에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셨고 결혼식을 끝내고 한없이 대성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전화하면 “여보~슈. 응 경숙이냐” 하시던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그렇게 한 사람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오며 부모님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동반자를 만나 생활고에 걱정하면서도 내 꿈을 버리지 못하고 아이들이 본인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기에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에 어린이집을 인수받았을 때 너무나 기뻐하시던 부모님! 술을 드시지 않으면 표현을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고생했다 하며 웃으시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렇게 자식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 오빠는 교직에 장으로 동생들은 공직자 외 도장을 운영하고 개인에 능력을 살려 각자 자리에서 자리를 잡아갈 즈음 아버지의 인생에 가장 어렵고 힘든 역경의 시기가 왔다.

 

그것은 대장암 3기에서 4기로 넘어가는 시기로 진단을 받았다. 진단을 받을 시기 길어야 6개월로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고 가족들은 수술하지 않으시겠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천안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받고 나오신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그동안 알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고 항암 치료를 받으실 때는 환각 증상으로 엄마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시지 않고 깔끔하게 -본인의 옷은 항상 손수 빨아서 입었다- 살아오시던 아버지의 일상생활을 모두 망가지게 하였다.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서 매번 내가 모시고 가야 했고 보통 시골에서 올라오시면 1주일씩 집에 계셔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식사 준비가 어려워 외식을 하게 되는 날이 있었는데 고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곤드레 정식을 드시고 하시는 말씀이 “고기가 없어 맛이 없네.”라고 말씀하시며 나오시는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80살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약을 드실 시간은 1분도 어긋남 없이 드시던 아버지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 소파에 앉아 약이 줄어든 것을 보시고 손바닥 위에 약을 한참을 세고 또 수량을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다음날 시골집에 모셔다 드리는 중간에 마트를 들려 시장을 보려 할 때 차 안에서 항상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같이 내리셔 고기를 파는 앞에 서 “경숙아, 삼겹살 좀 사라.” 말씀하셔 “아버지, 삼겹살 드시고 싶어요?”라고 말을 한 후 삼겹살과 다양한 식품을 구매해 시골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을 내려드리고 올라오려는 순간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일상 대화로 알고 그냥 올라왔다. 그로부터 4일 정도 지나고 아버지는 식사를 제대로 못해 병원에 입원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는 2년 동안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아버지 맘을 헤아리지 못한 채 무엇을 했는지 아버지를 보내며 많은 후회와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 집에 가면 음식을 차려 드리고 사진을 아버지만 찍어 드리고 아버지가 음식을 드신 후에는 하나라도 먹고 오는 습관이 있는데 얼마 전에는 아버지와 둘이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엄마 할아버지랑 같이 찍어 드릴게요.” 하며 찍어 주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경숙아 저녁 먹고 가라~~”라는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아버지는 아무런 말없이 바라만 보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아버지는 묵묵히 바라만 보고 계셨다.

 

아버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경숙아! 경숙아~~” 수십 번 부르면 이제는 ”왜~유“라는 대답은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네”라고 대답할 텐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이 찍어 준 사진을 보던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여행을 모시고 다니면서도 부모님 두 분만 사진을 찍어 드리거나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은 있었지만, 아버지와 단둘이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슴이 멍해 왔다. 그러면서 옆에 신랑하고 딸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단둘이서 찍은 사진은 처음 보네.”라고 이야기를 건네며 씁쓸함과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다음날 출근을 해 선생님들과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버지와 둘이서 찍은 사진이 있는지 물어보니 선생님들 모두 없다고 말씀해서 이번 명절에 혹시 부모님을 뵙게 되면 부모님과 많은 추억을 만들고 아버지와 사진을 찍으시라고 말했더니 선생님들이 좋은 말이라며 감사를 표현하며 실행에 옮겨보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많은 아버지들이 우리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보고 있어도 혼자 외롭고, 쓸쓸함에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들이 없기를 바라며 다시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보고 싶은 아버지! 사람의 일생을 소풍으로 표현한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소풍을 재미있게 잘 다녀가셨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리고 묻고 싶다.

 

잘 계신지, 보고 싶지 않은지, 나는 사무치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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