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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탐사 기획보도…제15탄, 독립 위해 목숨 던진 매헌 윤봉길 의사!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기사입력 2021/09/17 [15:32]

[특집]탐사 기획보도…제15탄, 독립 위해 목숨 던진 매헌 윤봉길 의사!

충청남도 지역 언론 지원사업…내포 문화의 역사적 인물집중 탐방

정덕진 기자 | 입력 : 2021/09/17 [15:32]

 

박성기 교수 (U1대학교 문화복지융합과)

 

 

100여 년 전 우리 민족이 주권을 잃은 참담한 현실 앞에 나라를 되찾고자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던진 25세 청년 윤봉길 의사를 만나기 위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 기념관과 생가를 찾았다. 기념관은 국가지정문화재로써 윤봉길 의사 유적(사적 제 229)로 지정되어 윤봉길 의사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에 지정된 현충원이다.

기념관 내에는 윤봉길 유품인 보물(568-2, 568-3)과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유적은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사당)와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 윤 의사가 4세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민족운동을 했던 저한당, 윤봉길 의사께서 태어나 4까지 성장했던 광현당, 농촌부흥 운동을 했던 부흥원이 위치해 있었다.

 

4세부터 중국 망명 시까지 살던 곳/자한당

 

 

윤봉길 의사는 호는 매헌, 본명을 윤우의 이며 자는 용기,별명이 윤봉길이다. 그는 19086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리 시향리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상원 사이의 5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 의사 나이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을 시기는 1910829일 한일병탄으로 일본에 의한 무단정치가 실시되던 상황이였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칼을 차고 수업을 하며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 언어를 배워야 했던 참담한 현실 앞에 영웅은 1919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2세에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를 한 후 1921(14)까지 매곡 성주록의 오치서숙(서당)에서 유학을 수학하였으며 동아일보, 개벽등을 통해 해외의 새로운 문물과 신사상을 수용하여 한시집, 임추, 옥타300여 편의 한시를 남겼다.

 

오치서숙을 졸업한 후에는 1926(19)까지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과 부흥 운동을 전념하며 농민 독본이라는 야학 및 농촌운동교재를 저술하였으며 1929(22) 423일에 당시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친일매국행위에 한탄하며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한다는 뜻의 월진회(月進會)조직하여농촌부흥운동과 문맹 퇴치,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1930(23) 윤의사는 대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비장한 글을 남기고 정든 가족을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를 만난 25세의 청년 윤 의사는 1932426일에 의열투쟁은 개인적인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에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하였다.

 

거사 당일인 4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은 윤 의사는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결언한 마음으로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1140분경 천왕의 생일인 천정절과 상하이사변 승전축하행사의 국가연주가 끝날 무렵 사전에 준비한 도시락 폭탄을 단상으로 힘껏 던졌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사의 김구선생과 만남, 한인해국단 가입모습(자료 :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편집)

 

윤 의사는 그해 5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혹한 고문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12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일보군의 총탄에 순국했다. 순국 후 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었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당시 윤 의사의 의거는 곧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와 기념관 동상 앞에 서서 영웅의 고귀한 희생적 행동에 고개가 숙이며 충청의 젊은 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었다. 후세인 우리가 해야 할 의무는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바친 윤봉길 의사의 충절의 정신을 모두 가슴에 품고 이 땅에 두 번 다시는 나라를 잃고서 젊은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생가터 옆 윤봉길 의사 동상


[본 기획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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