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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소녀 유관순 누나 추모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20/12/09 [15:23]

애국소녀 유관순 누나 추모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입력 : 2020/12/09 [15:23]

 

 

유관순 열사는 병천면 용두리(지령리)에서 1902년 12원16일(음력 11월17일) 고흥(古興) 柳氏系 흥양(興陽) 柳氏 집안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 열사는 이름 漢字가 柳寬順과 柳冠順으로 알려져 온다. 호적(戶籍)에는 冠順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0년 9월28일 18세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 시신은 찾을 수 없어 병천 유관순 사우(祠宇)에 초혼(招魂) 묘로 조성했다. 1919년(4월1일) 아우내장터만세운동 현장에서 아버지 지령리 야소교회(1901년) 유중권(柳重權) 선생과 어머니 이소제 여사도 일본 헌병 칼에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상부가(孀婦歌)로 유명한 어우당 유몽인(柳夢寅)의 동생 유몽표(柳夢標) 후손이다. 미국 부인 선교사 사애리시(史愛利施) 도움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이화학교로 유학할 수 있었다. 유관순 누나는 우리 모두의 애국소녀 누나로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유관순 열사의 잘못 알려진 생애에 대한 교정 내용을 거듭 밝혀 알리며 유관순 열사 부친 유중권 전도사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 그리고 유관순 열사를 추모한다. 향토사가 임명순 선생이 애써 밝혀낸 사실들이다.

 

첫째, 유관순 열사의 탄생 연월일은 1904년 3월15일이 아니고 족보와 호적을 확인한 1902년 양력 12월16일 음력 11월17일이다.

 

둘째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은 1920년 10월12일이 아니고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20분이다. 1919년 4월1일 아우내장터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 아버지 유중권 선생 호적에는 기록이 없으므로 호주 상속인 유관순 열사 큰 오빠인 유우석 선생의 호적을 확인했다.

 

셋째, 유관순 열사 선조라는 의병장 유인석은 먼 친척이다. 유관순 열사는 고흥 유씨 흥양(興陽) 검상공파 이지만 유인석은 부학공파 먼 일가 어른이다. 또 옛 어른 중에 어우당 유몽인의 아우인 유몽표의 후손이다.

 

넷째, 외동딸이 아니고 둘째 딸이다. 호적에 언니가 있었는데 만세운동 전에 출가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언니가 없어서 외동딸로 알려졌다.

 

다섯째, 유관순이 다니는 용두리교회는 1908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1901년에 세워졌다. 열사 집안 되시는 유빈기 선생은 1907년에 일본인 헌병대가 의병과의 전투에서 교회가 소실된 것을 1908년에 다시 세웠다. 용두리교회(지령리교회)는 현재 유관순 열사 생가 옆에 이화여고와 감리교 재단에서 기념교회 매봉교회를 건립했다.

 

여섯째, 용두리교회 교인들이 천안지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대한매일신문(8/16) 보도에 갈전 용두리 지령야소교당 유관순 열사 숙부 유중무, 조성배(조병옥 부친), 유성득, 유일신, 유도원, 유치운, 유우석, 조형원 선생 등 77명이 참가했다.

 

일곱째, 아버지 유중권 선생은 지령리교회에 진명학교를 세웠다. 1910년 7월9일 대한매일신보에 진명학교를 세웠다는 보도로 보아 추측할 수 있다. 홍호학교는 1909년 목천 군수와 유지들이 목천에 세운 학교이다.

 

여덟째, 유관순 열사는 3년형의 언도를 받는다. 아홉째, 유관순 열사의 키는 169.7cm이다. 유관순 열사의 키는 상당히 큰 키에 속한다.

 

열째, 유관순 열사는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않았다. 열사와 같이 재판받은 다른 모든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기각된 판결문이 있다. 이 판결문에는 열사의 이름이 없다. 재판을 거부했다고 본다.

 

열한 번째, 아우내만세장터 장소는 수신 방향으로 가는 길의 병천川 다리 가기 전에 개울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길게 있었던 옛 만세운동 넓은 장터를 찾을 수 있다.

 

열둘째,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토막살해 된 것이 아니다. 열사는 부모 모두를 일본 헌병 총칼에 살해되어 돌아가신 홀로 고아가 된 마당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목숨 걸고 저항하고 만세 부르며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다. 끝내 고문을 받아 방광파열로 순국한 것으로 파악 되었다. 열사의 시신은 바로 인계되지 않고 시신을 부검하고 가매장이 된 후에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도하였기에 부패가 심하였다.

 

열셋째, 유관순 열사 시신 인도는 프라이 선생이 아니고 월터 선생이다. 프라이 선생은 기록에 이미 미국에 돌아갔고 대리인 월터 선생이 시신을 인수하여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으나 후에 묘지를 찾지 못했다.

 

열넷째, 유관순 열사의 한자 이름은 호적은 柳冠順이고 수형기록표에는 柳寬順이다. 이런 사실들은 2004년 이후 발행되는 유관순 열사 전기 책자 등에는 바르게 기술되었다.

 

유관순 열사 탄생일을 맞이하여 거듭 사실을 주지(周知)하면서 열사와 가족들을 추모한다. 유관순 사우네 조선된 유관순 열사 묘는 초혼 묘이다. 유관순 누나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애국소녀 누나로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천안역사문화연구소

 

                                                                                 소장 經堂 김 성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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