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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 성씨의 유래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기사입력 2020/01/08 [09:57]

우리민족 성씨의 유래

천안역사문화연구소장,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김성열

편집부 | 입력 : 2020/01/08 [09:57]

  

  © 편집부

우리 민족의 姓은 어림잡아 300개 정도이다. 본관(本貫)은 5천개나 된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총 5,582개의 성씨가 있다고 한다. ‘김(金)’씨 성을 가진 사람이 1,069만명(전체 인구의 21.5%)으로 가장 많았고, ‘이(李)’씨 성과 ‘박(朴)’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각각 14.7%(731만명)와 8.4%(419만명)로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새 성씨를 포함해 ‘최(崔)’씨 215만명 등 10대 성씨를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63.9%를 차지하고 있다.

 

성씨는 사람의 혈족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를 뜻한다. 핏줄이 같은 사람들은 같은 성씨를 갖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성씨는 원래 어머니의 핏줄을 뜻했던 ‘姓(성)’이라는 말과 자신의 조상이나 출신 지역을 뜻했던 ‘氏(씨)’가 합쳐진 말이다.

 

성씨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중국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처음 성을 쓴 사람은 중국 역사의 기원을 담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농씨이다. 신농씨는 ‘강(姜)’을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강수(姜水)라는 곳의 지명에서 성을 따왔다. 신농씨와 더불어 중국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황제’란 인물은 그의 어머니가 희수(姬水)라는 곳에 살았기에 ‘희(姬)’라는 성을 가졌고, 성(姓)이라는 한자에 여자 여(女) 자가 들어가 있는 것도 이렇게 성이 어머니의 핏줄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씨(氏)는 남성들이 아버지의 핏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들이 새로 정착해 살게 된 지명이나 가까운 조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대 중국이 농사를 짓고 정착해 살아가는 농경사회로 변하면서 남성의 역할이 점점 커지게 되자 아버지의 핏줄을 뜻하는 ‘씨’가 등장한 것이다. 이후 성은 주로 혈통을, 씨는 출신 지역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다 점차 섬과 씨를 구분하지 않고 ‘성씨’로 합쳐 쓰기 시작하게 된다.

 

우리 민족이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69년 시라를 세운 혁거세 박처럼 생긴 둥근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박씨 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유리왕이 초기 신라를 이루던 6개 촌의 촌장들에게 각각 이(李), 정(鄭), 최(崔), 손(孫), 배(裵), 설(薛)이라는 성을 내려주었다고 나와 있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의 성은 고(高)씨고 이름이 주몽이라는 이야기와 백제 왕족의 성씨가 부여(扶餘)라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하지만 사실 삼국시대 초기에는 성씨가 없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삼국시대에 성씨와 한자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 백제 근초고왕,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각자의 성씨를 정한 왕족과 귀족이 생겨났고, 고려 때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삼국사대 왕족 계보를 바탕으로 삼국시대 초기 인물들에게 한자식 성과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우리나라에 성씨가 늘어나게 된 중요한 계기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토성분정(土姓分政)이라는 정책을 시행한 것과 조선후기의 족보 매매가 늘어난 것이다. 지방 세력의 도움을 받아 고려를 세우고 왕이 된 왕건은 성씨가 없던 지방 세력가들에게 각자 다스릴 땅을 정해주고 성씨를 내려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토성분정 정책이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지방 세력을 왕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왕의 세력을 키우지 않으면 당시에 힘이 강했던 지방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지방 세력가들에게 다스릴 땅(土)과 성씨(姓)를 나누어(分) 정해(定) 이들의 마음을 사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토성분정 정책이다. 지방 세력가들의 부와 권력을 인정해주어 고려 왕실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 성씨의 출신 지역을 뜻하는 ‘본관’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왕건이 성씨를 내려주었지만 조선중기 전까지 한반도에 사는 사람 중 성씨가 없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했다. 대대로 천민은 성씨를 가질 수 없었고, 평민 중에도 성씨가 없는 사람이 있었다.

 

성씨를 가진 사람이 더 늘어나게 된 건 조선 후기에 천민이나 평민들이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양반들로부터 족보를 사들이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들인 족보를 위조해 스스로의 핏줄을 양반으로 만들고, 동시에 그 성씨를 따르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게 된 때는 조선 말기인 1909년 인구수를 조사하고 신분을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호적제도(민적법)가 시행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우리나라 姓은 어림잡아 300개 정도이고, 본관(本貫)은 5천개나 된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국적으로 귀화한 성씨도 442개가 된다. 中國 姓氏는 7천여 개인데 10개 姓氏가 85%이다. 日本 姓氏는 3만개 정도이다. 日本은 한국과 중국이 姓名 3字 로 표기하는데 달리 이름 앞에 本貫을 포기하여 4字로 표기한다. 姓氏 本貫은 이름 앞에 표기되어 이름의 역사정신을 전수 전승하고 있다.

 

                                                                                   천안역사문화연구소

 

                                                                                    소장 經堂 김 성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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