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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아픈 6.25한국전쟁을 잊지말자

편집부 | 기사입력 2010/06/24 [10:21]

뼈아픈 6.25한국전쟁을 잊지말자

편집부 | 입력 : 2010/06/24 [10:21]
▲ 임명섭 주필
“누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르겠는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전 전선에서 남침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던 국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적의 손에 내주고 후퇴를 거듭했다. 국군은 특공대를 조직해 북한탱크에 자폭하는 투혼을 발휘하며 적과 맞서 싸웠다.
 
결국 경상도 지방을 제외한 전 국토를 빼앗기고 후퇴를 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한 남한의 국회의원 및 정부인사, 많은 우익 국민들을 인민재판이란 명목하에 즉격 처분해 죽창으로 사형당했고 남한의 젊은 청년들을 대규모 강제 징집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전해 들은 미국은 UN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해 전 세계에 북한의 기습남침을 규탄하며 UN군의 파병을 호소했다. 제 2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일본에 주둔중인 미 24사단 선발대 600명 가량을 한국의 오산전투에 투입했으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대대병력의 2/3가 전사·실종되는 피해를 입고 한국군과 함께 퇴각 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 기점으로 설정하고 북한군과 혈투를 벌였다. 결국 UN의 한국파병 결정으로 미국, 영국, 영연방국(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들이 한국에 병력을 파병을 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인도 등의 중립국은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원수는 미군을 앞세운 대규모 UN군 병력을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낙동강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던 UN군과 합류, 북으로 진군했다. 이 때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의 초산진과 신의주까지 밀고 올라갔다. UN군이 38선을 넘자마자 중국의 모택동은 30만명에 달하는 중국군을 만주국경 지대에 배치했다.

물밀듯이 남으로 밀고 내려온 중국군과 북한군은 충청도 근방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UN군의 반격에 다시 북으로 밀려 올라갔다. 전선은 38선 근방에서 일진일퇴를 벌이며 UN군의 우세속에 전쟁의 양상이 전개됐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여 결국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런 전쟁의 역사가 담겨있는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며칠만 있으면 60년이 된다. 일제로부터 광복을 이루고 대한민국을 건국한지 2년 만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물론 6·25 한국전쟁 같은 일은 앞으로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 될 민족적 대 비극임이 틀림없다. 전쟁의 결과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전 국토를 휩쓸었다.
 
그런데 이런 비참했던 6·25전쟁이 안타깝게도 점차 우리 사회에서 잊혀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과거 없는 현재가 있을 수 없기에 6·25전쟁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지나간 일에 대한 성찰을 잘못하면 현재 우리가 지켜야 할 일들을 모르고 지나쳐 버릴 수 있기에 미래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없다.
 
6·25는 남북이 모두 같은 민족으로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상대방 죽이기에만 골몰했다는 사실만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군사력을 이용해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게다가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측도 6·25 전쟁관을 비슷하게 말하는 국민도 있어 문제가 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실을 직시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한 북한을 냉철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비극은 다시 발생할 수 있다. 6·25전쟁이 적화통일을 노린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된 민족적 비극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치 못하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과 대부분의 달력에는 6·25가 ‘사변’으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6·25가 ‘전쟁’으로 돼 있다. 6·25를 놓고 사변과 전쟁으로 뒤썩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변은 나라의 중대한 변사로 선전포고없이 무력을 써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어 병력을 사용케하는 난리를 말 한다.
 
그리고 전쟁은 병력에 의한 국가 상호 간 또는 국가와 교섭 단체 간의 싸움으로 정의하고 있다. 때문에 사전상으로 봐서는 6·25는 ‘전쟁’이 아니라 ‘사변’이라 불리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진실을 오도하는 태도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무지를 조장하고 진실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때문에 자라나는 세대인 청소년들에게 6·25전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안보교육과 역사교육을 제대로 해 민족의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민족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6·25와 관련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우리 민족사의 비극인 6·25전쟁을 국민들에게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6·25 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였고 민족사상 최대의 참화가 빚어졌다는 것을 후세에 꼭 알려야 한다. 지금 6·25 전쟁에 참가해 우리나라를 훌륭히 지켜낸 생존자들은 어느덧 팔순이 넘는 나이가 됐다. 이제 머지 않아 다가올 6·25 한국전쟁의 날이 돌아온다 늘 그러해야 하지만 이날 하루만이라도 참전국가유공자로 불리는 이 분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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